Happy and blessed Thanksgiving!
오늘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를 신실하게 지켜주신 하니님께 감사드리길 소망한다.
매년 추수감사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감사드려야 할 것들이 많다.
하루 하루 바쁜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지 모르고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고 생각을 하면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란 걸 깨닳게 된다.
Footprint 라는 이야기를 다 아실 것이다.
어느 사람이 길을 걷다가 뒤를 보니 발자국이 두 세트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다.
그런데 언제 또 뒤돌아 보니 발자국이 한 세트 밖에 없는 것이다.
나중에 주님께 물었다.
주님께서는 나랑 같이 동행하시다가 왜 때로는 나를 혼자 두셨습니까?
특히 내가 혼자 걸어가던 그 시간은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인데, 그 때는 왜 나를 혼자 두셨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는데 그 혼자 걸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들은 내가 너를 안고 가고 있었다고.
발자국의 한 세트는 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금까지 어떻게 왔겠는가?
나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지난 35년동안 신실하게 지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물론 힘들고 어려운 시기들을 지났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그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이기고 지금까지 올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영원 무궁하신 이 우주의 창조주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신다.
오늘,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특별히 더 감사드리는 그런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자, 그런데, 얼마전에 글을 읽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야 하는데, 특히 아시안 기독교인들은 이 은혜를 받아드리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이다.
은혜로 말미암은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은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으면 그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아시안 기독교인들은, 물론 우리 한국인들도 포함, 은혜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것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먼저 은혜,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우리가 은사를 이야기 하면 어떠한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가 많다.
예언의 은사, 기도의 은사, 치유의 은사 등등.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은사는 “값 없이 받는 선물”이다.
영어로는 Free Gift 라고 한다.
우리는 구원을 은혜로, 은사로 받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구원은 우리가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잘 해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은혜, 은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든가?
아시아인들에게는 그 문화 속에 묻어 있는 유교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교 사상 속에는 거져 받는 선물이라는 것이 없다.
선물은 항상 갚아야 한다.
저는 한국에서 결혼을 했다.
전에도 한번 말씀 드린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예식장들을 알아보고 있을 때이다.
아내 측에서는 한 300여명, 우리 측에서도 150~200명, 총 500여명이 올 것으로 예상을 했다.
그런데 예식장은 250명정도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고 우리 아내는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총 500여명이 올 것인데 어떻게 250명 정도 들어가는 예식장이 충분한가?
충분하더라.
그 이유는 미국 결혼 문화와는 달리 한국 결혼 문화에선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이거나 친구들 뿐이고 나머지는 얼굴만 보이고 식사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왜 얼굴을 보이고 가는가?
서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저 사람이 내 가족 결혼식에 와서 얼마를 부조하고 갔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의 가족 결혼식에 가서 또 부조를 내야 하는 것이다.
설상 결혼식에 참석을 못한다 하더라도 부조를 보낸다.
금액도 저 사람이 10만원을 했으면, 나도 그 정도 선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또 가서 부조를 했으니까 식사는 꼭 먹고 간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축하의 선물의 의미보다는 내가 마땅이 해야하는, 갚아야 하는 도리인 것이 더 크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한국인들 사이에는 이 문화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어제 저희 아버지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집사님의 딸이 아틀란타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저랑 제 동생의 결혼식 때에도 참석은 못 하셨지만 부조를 꽤 하셨다.
그러니 어느정도 거기에 맞게 부모님도 부조를 하셨다.
한가지 예이지만 우리의 생각에는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빚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꼭 갚아야하는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은혜,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려고 한다.
목회자들도 우리가 얼마나 빚진 자들인지를 강조한다. (나도 이런적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독생자 마져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십시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 또한 그 빚을 갚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 이것이 맞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올바르게 살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정성것 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등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닌가?
맞다.
하지만 그 마음이 중요하다.
왜 우리가 열심으로 주를 섬기는가?
만일 우리가 열심히 주를 섬기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갚으려고 라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멍애이며 올무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잘 생각해 보라.
과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갚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는 것이다.
갚을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면 갚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부담감에 포로로 잡혀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바로 은사 그것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말 그대로 거져 주시는 선물이면 거져 받으면 된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갚을까 생각하지 말고 선물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된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까 말씀드린 열심과 봉사, 선을 행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들,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그 원동력이 내가 받은 것을 갚는다가 아니라, 내가 많이 받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삶으로 표현한다고 생각을 하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이 은혜를 다 값지 못할 것 같은 부담감이 아니라 자유롭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올바르게 믿음 위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감사함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삶으로 표현하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얻은 그 자유를 마음껏 즐기시길 소망한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