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찾는 자
누가복음 15:1-11,28-32
다들 지난 주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하여 들으셨으리라 생각된다. 또 다시 흑인 두명, Alton Sterling 과 Philando Castile이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는 흑인들의 삶이 중요하다 #BlackLivesMatter 이라며 시위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Dallas 시위 현장에서는 어느 저격수가 시위를 통제하려는 경찰들을 쐈고 5명의 경찰은 목숨을 잃고 7명의 경찰과 2명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다. 참으로 참담하고 슬픈 지난 몇 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 다 잠시 이 사건에 대하여, 사랑하는 자를 잃은 유가족들을 위하여, 그리고 부상당한 자들의 회복을 위하여 조용히 묵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SNS 를 보면 참 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인종차별을 하는 경찰들을 비판하는 글, 제도적으로 인종차별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글, 경찰들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며, 특히 폭력적으로 이 사태에 대하여 대응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글. 정말 많은 글들이 SNS 를 뒤덮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가 잘못이고 누구를 비난해야 하고, 누구를 지적해야 하는가? 백인들을 위한 정책만 주장하고, 총기 통제 법안을 막고 있는 공화당의 잘못인가? 아니면 오히려 대통령이 되고 모든 문제를 인종차별과 연결시켜 인종차별 문제를 더 악화시킨 오바마와 민주당의 잘못인가?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흑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흑인들이 증오해서 기회만 얻으면 그들을 죽이려고 드는 경찰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나랑은 별 상관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기시는가?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다. 결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문제가 아니다. 인종차별 문제는 이 사회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이 사회는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랑 직접 연관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면 이러한 미움과 증오와 폭력을 그냥 용납하는 것이다. 제3자는 없다. 우리 모두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여기에 제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는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본다.
1. 목숨을 잃은 Alton Sterling 과 Philando Castile 에 대하여는 깊은 애도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고 슬픈 마음 뿐이다. 그들이 어떤 잘잘못을 했던 간에 그들의 목숨 또한 귀한 목숨이고 함부로 앗아 가서는 안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위로만 간구할 뿐이다.
2. 마찬가지로 달라스 경찰들과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이들은 Alton Sterling 과 Philando Castile 의 사건과는 상관 없는 자들이었다. 단 시위를 통제하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섬기던 자들인데 단순히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해서 저격수에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된 경찰들.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3. 정말 인종차별 문제인가? 경찰들은 정말 흑인들을 증오하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려고만 하는가? 인종차별 문제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흑인들은, 특히 흑인 남자 청년들은 경찰들을 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잘못한 것이 없지만 단순히 흑인이란 이유로 의심을 받아야 하고, 같은 잘못을 하여도 더 크게 벌을 받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4.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모든 흑인들이 범죄자가 아니듯 모든 경찰들은 인종차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5. 이런 비극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말 순순한 의도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 평화롭게 시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자신이 유명해 지기 위해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어떠한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6. 여기에는 미디어도 포함이다. 자신들이 미리 정해 놓은 이야기와 사건들만 부각해서 다룬다.
7. 예를 들면 이렇다. Alton Sterling 과 Philando Castile 사건이 크게 부각되었으나 바로 그 전 주말, July 4th Weekend 에 시카고에서 흑인 60명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별로 관심을 못 받았다. 왜냐하면 흑인이 흑인을 죽인 것이니 이 나라에 인종차별이 큰 문제라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 뿐인가? Freddie Gray 사건 이후 Baltimore 에서 일어난 300여건의 살인 사건은 그냥 조용히 덮어두고 넘어갔다.
8. 경찰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Black Lives Matter 같은 운동은 경찰이 흑인을 죽였을 때만 시위하고 서로를 죽일 때에는 조용한가?
9.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들을 인터넷에 올린다. 답답해서 이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몇 칠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월호 사건을 잊어버린 것처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다 정리를 못하겠다. 너무도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날 때도 있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 우리 피부의 색깔 문제가 아니다. 죄의 문제다. 죄 때문이다. 이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비극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죄의 문제의 해결은 단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 추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다.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어둠은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오직 빛 만이 어둠을 몰아낸다. 미움은 미움을 몰아내지 못한다. 오직 사랑만 할 수 있다.”
어둠을 몰아 낼 수 있는 참 빛은 무엇인가? 미움을 몰아 낼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은 무엇인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빛 추어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질 때, 바로 그곳에 소망이 있다. 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추하고, 더럽고, 죄가 들 끓는 이 세상의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크게 역사하시기를 소망한다.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다. 이 세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런 방법, 저런 방법들을 다 구해보지만 참된 해결책은 복음에 있고 그 복음의 소망은 우리에게 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본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다른 곳을 읽었다. 탕자의 비유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데 탕자의 비유는 끝 부분만 읽고 오늘은 이 비유 전에 나오는 비유 둘을 함께 읽었다.
다시 한번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을 보자.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에게 말씀을 전하셨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세가지 비유이다. 하나는 잃은 양의 비유,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은 잃은 아들의 비유이다.
이 세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한명은 한마리의 양을 잃었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에선 여인이 동전 하나, 드라크마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비유에선 아버지가 아들을 잃었다.
두번째 공통점은 그 잃어버린 것을 다 찾았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았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도 돌아와서 찾았다.
세번째 공통점은 찾은 후 큰 즐거움의 잔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은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9절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는 22-23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그리고 마지막 공통점은 이 잃었다가 되찾은 것들이 회개한 죄인을 상징하고 있고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인이었던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세 비유는 공통점들이 있고 또한 전계가 비슷하다. 처음에 잃고, 그 다음에 찾고, 그리고 다 즐거워하며 잔치를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첫 두 비유에는 있는데 마지막 세번째 비유에는 없는 것이 있다. 혹시 무엇인지 알겠는가? 바로 잃어버린 것을 찾는 자다. 양을 잃은 목자는 양을 찾았고, 동전을 잃은 여자는 집을 뒤져 동전을 찾았다. 그런데 마지막 비유에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과연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을 찾았어야 하는 자는 바로 첫째 아들이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했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마땅히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갔어야 하는 것은 바로 형이었다.
그런데 형은 동생을 찾으러 나가기는커녕 동생이 돌아오자 오히려 화를 내고 있다. 동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를 원한다. 바로 이런 미움과 증오가 오늘날 이러난 사건들의 원인이지 않는가?
여기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또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세리와 죄인들은 둘째 아들 같은 존재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첫째 아들이다. 그런데 이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증오하고 미워한다. 아버지와 가까이 있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께 가까이 있는 자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분이 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계셨던 분.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나서신 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시고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진정한 첫째 아들이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오신 진정한 첫째 아들이시다.
찾는 자들을 위한 예배 같은 것을 많이 접한다.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맞추어진 예배. 하지만 진정한 찾는 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자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아직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을 찾아 그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다. 미움과 시기와 증오 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사랑만이 이 세상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다.
특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슬퍼하고 상처 입은 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 슬퍼해 줘야 한다. 함께 공감해야 한다. 또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사랑을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