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로 자유롭게
요한복음 8:31-38
저의 가정이 89년도 이민을 준비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 초등학생인 저는 왜 이민을 가는지, 어떻게해서 미국이란 나라를 선정했는지 모르고 단지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물어본 기억이 난다.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가면 안되겠는가 하고…
왜냐하면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고 또 무엇보다 기독교 나라이라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때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 미국도 기독교 나라이다 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두 나라다 기독교인들이 많고 어느정도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들이지만 기독교 나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무슬림이 다수가 될 나라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국은…아직도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진정으로 믿는지는 의문이 든다.
2, 3년 전 통계를 보면 미국의 기독교인들 중 절반도 안되는 숫자가 4 복음서의 제목 중 하나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데 그들이 정말로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 이 말은 참 많이 들었는데 과연 믿음은 무엇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정으로 믿으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되고, 자유롭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가?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30절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0절에 나오는 이 믿음과 31절에 나오는 믿음은 다른 믿음이다.
30절은 영어로 “many believed in him” 인데 31절은 “Jews who had believed him”이다.
어떻게 다른가?
한국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데…의역을 하자면 30절은 예수를 믿은 것이고, 31절은 예수에 대하여 믿은 것이다.
여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의 참 믿음이 무엇인지 분별이 된다.
하나는 예수께 나의 삶 전체를 드리고, 의지하는 그런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셨구나, 무슨 이적들과 사역들을 하셨구나 아는 믿음이다.
예를 하나 들겠다.
19세기 블론딘이라는 곡예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블란서에서 태어난 이는 자라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곡예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공연을 할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폭포 위로 외 줄을 타고 건너간 것이다.
외줄을 타면서 중간에서 돌아오기도 하고 수례를 몰고 가기도 하고, 중간에서 요리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등에 다른 사람을 업고 외줄을 타고 폭포를 건너갔다.
반대편에서 등에 탄 사람을 내려주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을 등에 태우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는가?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다, 내가 지금 보지 않았느냐?
그때 블론딘은 그럼 업혀라 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반응이 죽어도 못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하여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을 했는지를 알지만 그에게 업히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삶을 그에게 다 맡겨서 그가 나를 안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그런 믿음 가운데 우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가?
예수에 대하여 알면서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 안에 거하고 그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들의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남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헐띁는가?
자신들의 생각과 계산 아래 일을 진행하고 있는가?
내 복을 내 욕구를 챙기기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지 정말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가?
기도의 힘에 대하여는 알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이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면 나아가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되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를 알리라.
진리에 대하여는 더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진리는 영적인 무엇인가를 우리가 더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이치에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참 어려운 것은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믿는 그것은 나에게는 진리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너는 예수를 믿어라 – 그것이 너에게는 진리이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진리가 아니다.
아니, 이것만큼 어리석은 말은 없다.
진리는 그 자체가 절대적일 수 밖에 없다.
만일 상대적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 세상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살인은 악한 것이데 그것을 상대적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수가 정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절대적이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참 진리이다.
우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고 말씀 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자유을 얻는가?
첫째는 무식함, 무지함에서의 자유함이다.
무식, 무지함은 위험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다가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보스톤에서 살 때 교회에서 스키장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갔다가 Double Black Diamond 로 들어서서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영적의 무지함도 위험하다.
내 자신이 어떤지도 모르면 괜찮겠다고 계속 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33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고 반발한다.
문제는 종이 된 적이 많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종 생활, 사사시절 블레셋과 미디안 등의 지배, 앗수루, 바벨론, 메도 페르시아, 그리고 지금은 로마…
물론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이스라엘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고 자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자유롭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것을 할터인데 그렇지 않고 있었다.
결국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하신까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받아드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알게 해주고 우리가 얼마나 구세주가 필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자.
두번째로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신다.
34절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의 심판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의 심판에서 자유롭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죄의 힘에서 죄의 능력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아니 아직도 떨쳐보내지 못한 죄의 모습들이 있다면 예수께 나아가라.
그가 해결해 주시도록 해야 한다.
진리로 말미암아 더 성숙해지고 성결해 지는 참빛교회가 되자.
마지막 결론으로 자유를 얻은 자들이 해야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도록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가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다.
죄인을 받아 주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다.
성경의 예화를 보자.
예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켜 주셨을 때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다.
그의 배옷을 벋겨 주는 일은 주의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사울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 예수님이시다.
그가 바울이 되는 과정 속에는 아나니아와 바나바 등의 도움이 있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그를 아들로 다시 받아 주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다.
그런데 옷을 입히고, 반지를 가져다 주고, 신을 신기고, 소를 잡는 일은 하인들의 일이다.
죄에서 자유를 얻은 우리는 그런 일들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핑계는 많다.
나는 너무 어려서, 혹은 나는 나이가 많아서…
나는 너무 연약해서…
나는 가르치는 달란트가 없어서…
나는 재주가 없어서…
나는 말을 잘 못해서…
아니…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다.
다 순종하며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Howard G. Hendricks 라는 달라스 신학교 교수는 Bill 이라는 사람에게 집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Bill 이 나는 가르치는 은사가 없다 라고 했다.
어떻게 아느냐? 가르쳐 본적이 있느냐 라고 물어보자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은사가 없는 것은 안다고 했다.
어떻게 아느냐? 한번 해 봐라…
계속 이러다가 Bill 은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제 Hendricks 교수는 신학교수보다 성경을 더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기 원하는 학생들을 Bill 에 보낸다고 한다.
예수를 믿고, 예수의 진리로 자유를 얻고, 그 자유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