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새로운 의미
누가복음 15:1-3,11-32
몇 칠 전에 읽은 글이다. 개혁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Warfield 가 말한 것 처럼 “하나님 중심”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가 가장 중요한 개혁신앙의 요점이다.
Mason Pressly 는 말하기를 “감리교에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죄인의 구원이고, 침례교는 거듭남의 신비이며, 루터교는 믿음으로 받는 칭의, 모라비안은 그리스도의 상처, 정교회는 성령의 신비로움, 로마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이고 개혁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섭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여러분, 혹시 QT를 하는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가? 최근에 들어 저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된 말씀은 우리가 같이 탕자의 비유를 나누면서 제가 많이 인용하는 Tim Keller 목사님의 설교인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외치시기를 “엘리 엘레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계셨던 것이다. 시편 22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1절 말씀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말씀 하신 것이다.
다른 것 보다 가장 큰 교훈은 그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어려움을 겪으시거나 시험을 당하시거나 어떠한 힘든 상황이 오면 항상 말씀으로 그것들을 이기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경 말씀을 외우시며 가슴에 품고 계시고 죽음의 현장에서도 말씀을 외우고 계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왜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깊게 생각하고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기를 축원한다.
그런데 QT는 어떻게 하는가? 그 말씀을 읽고 내가 편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말씀을 생각하면 안된다. 어떤 교훈을 얻을까 해서도 안된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이 하나님에 대하여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에 비추어진 내 모습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지난번에 이어 오늘 우리가 다시 본 이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지난번 우리는 함께 보기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낭비하신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값어치가 없는 것에 많은 돈을 쓴다면 그것은 낭비이다. 자격이 없는 곳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면 그것도 낭비일 것이다. 유치원생에게 산수를 가르치기 위하여 대학 수학 교수를 과외 선생으로 둔다면 엄청난 낭비이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낭비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즉 하나님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만큼 이 아들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렇게 크고, 놀랍고, 깊은 사랑의 하나님을 이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또 물어봐야 하는 질문은 과연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본문이 말하는 우리는 바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두 아들이 바로 우리이다. 그렇다. 지난 번에 봤듯이 두 아들 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의 제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서 그것을 흥청망청 써 버렸다. 그는 불순종과 죄와 악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 뿐 아니라 첫째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을 지난 번에 나눴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일하며 순종하며 살아온 자다. 그런데 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 일은 열심히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제산을 강제로 얻어 갔다면 첫째 아들을 아버지의 제산을 순종함으로 얻기를 위했지 아버지를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하여 사는 방법은 크게 나누면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회의 도덕적 가치, 규칙, 관습 등을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 발견적 삶이다. 두 방법 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아가며 이 세상의 문제들 해결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고 하는 노력들이다.
비유에서 나오는 첫째 아들은 바로 사회의 규칙과 관습을 따르고 순응하는 자다. 개인의 취향이나 바램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삶을 더 중요시 생각한다. 규칙대로 살고 열심히 살아야 행복이 온다고 믿는다. 만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그 실수에 대하여 후회를 하고 뉘우치는 지도 중요하다. 잘잘못 모두 다 열심히 해야한다.
둘째 아들은 자신 발견적 삶을 사는 자이다. 전보다는 지금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개인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길을 택하고 사회가 바라는 것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사회의 전통이나 권위 등이 사라지고 자신의 마음대로 살수만 있다면 자기는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전영화 중 Witness 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Rachel 이라는 아미쉬 과부가 나오는데 그는 아미쉬파가 아닌 경찰 John Book 과 사랑에 빠진다. Rachel 의 시아버지 Eli 는 이런 사랑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장로들이 Rachel 을 벌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아주 유치한 사랑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자 Rachel 은 유치 한지 안인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하겠다” 라고 답하나 Eli 는 “아니, 장로들이 결정한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면 내가 결정한다” 라고 말한다. Rachel 은 “아니 당신이 느끼는 수치심은 당신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그 시아버지에게서 떠난다.
바로 이 이야기 안에 두가지 삶의 방법이 다 있다. 하나는 “나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전통과 공동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라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내 삶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라는 삶이다. 두가지 삶의 방법. 하지만 둘다 원하는 것은 똑같다. 자기 자신의 행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 영어로는 Transgression 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선을 넘는 것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 경계선을 넘는 것. 스포츠를 보면 선수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공을 상대방에게 넘겨 주게 된다. 그리고 또 위험하다. 고등학교 때 배구를 하는데 상대방이 네트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리고 그의 발을 밟고 발목이 접질린 적이 있다. 몇 칠 동안 걸을 수 도 없을 정도였다.
둘째 아들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 아닌가?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 바라는 것을 다 저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아버지의 제산을 가지고 가출하는 삶. 그 시대 유대 사회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 했던 삶이다. 아버지의 제산을 탐했고, 창녀들과 놀았고 부정한 짐승과 생활하기도 했다. 죄에 빠져 있는 그런 삶이고 이것이 죄라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는 다른 뜻도 포함되어 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죄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다른 대표적인 죄에 뜻이라면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도 죄다. 다시 스포츠 비유를 든다면 사격이나 양궁 같은 것에서 과녁을 향하여 쏘는데 그것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향해야 하는 과녁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자. 첫째 아들의 삶은 사회적 규칙과 관습을 존중하는 삶이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 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것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시켜 전통을 지키는 삶이다. 이러한 삶이 죄가 될 수 있는가? 도덕적이고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간 이 첫째 아들의 삶이 죄의 삶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죄가 될 수 있다. 만일 그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회와 공동체, 그리고 전통이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첫째 아들은 순종했는가? 왜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항상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가? 결국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이 형의 몫인 제산을 가지고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의 마음은 들어 난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겠다. 단기선교이다. 우리 교회도 10월쯤 단기 선교 답사를 예정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 선교에 더 힘을 쓰려고 하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단기 선교가 도움이 되기 보다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주로 단기선교를 생각하면 제3세계에 가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몇 칠 간 봉사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이 봉사 자체가 아니다. 봉사는 중요하다. 봉사를 통해 굶주린 자가 식사를 할 수 있고 집이 없는 자들이 집을 얻을 수 있고 또 말씀과 찬양과 연극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기선교를 가는 목적이다. 단기선교를 다녀오면 뿌듯하다. 내가 무언가를 한 것 같다. 도움을 준 것 같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가진 부와 축복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줄어든다. 많은 사람들은 이래서 선교에 간다. 바뀐 것은 무엇인가? 사실 별로 없다. 나는 아직도 이 축복의 땅에서 잘 살고 있고 저들은 아직도 굶주리고 벌거벗고 있고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옳고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결국 그 것은 내 순종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조종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도록. 아버지의 제산을 순종으로 취하기를 원했던 이 첫째 아들처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아들인가?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제가 참빛교회에 온지 이제 6개월이 지났다. 가만히 지켜보니까 대부분 첫째 아들이 많은 것 같다. 몇몇 분 빼 놓고는. 왕년에 어떠셨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큰 잘못을 한 분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 가운데는 모태신앙도 많고 교회 안에서 그래도 나름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했던 분들이 대부분 인 것 같다. 나도 그랬다. Pastor’s Kid 을 PK 라고 하는데 그것은 problem kid 아니면 perfect kid 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perfect kid 이 됬는지 아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내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지 보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