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적 – 요한복음 11:28-44

올 시즌 세계 최고의 축구 무대인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극과 극을 오가고 있는 한 선수가 있다.
대한민국의 손흥민 선수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그는 당연 영국에서 가장 핫 한 선수였다.
차범근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을 갈아치웠다.
몇 경기 연속 골 행진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경기에서 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공격수가 많다 보니 다른 선수들을 더 기용하려고 상승세였던 공격수 손흥민을 수비 윙백으로 돌렸다.
처음으로 맡은 포지션이다 보니 어색했고 결국 손흥민은 실수를 저지르고 상대방에서 페널티킥을 주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과는 다른 모습의 선수가 되고 오늘 하는 경기에는 출전까지 불투명해졌다.

한번의 일, 혹은 여러 일이 어느 한 순간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뒤 바뀌는 순간이 될 수가 있다.
인생의 변환점을 말하고 있다.
그 한 순간 때문에 갑작히 모든 것이 다 좋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다르게는 그 한 순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접한 말씀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이적, 즉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이적을 행하셨다.
사랑하시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시다고 선포하시며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 – 예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이적 가운데 가장 큰 이적이요 예수의 사역의 클라이맥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예수의 삶의 변환점이 되어버린다.
이 이적 때문에 지금까지 예수를 싫어하고 시기하던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45절 이후의 내용을 보면 이 이적을 본 몇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하고 그들이 모여 어떻게 할지를 모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 그 해 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말하기를 (49-50절) –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리고 53절에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가야바의 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예수를 죽여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살리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자는 뜻이었으나 그가 뜻하지 않게 이 말씀은 진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51-52절 –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계략마져도 당신의 영광으로 돌려 쓰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나사로를 살려 주시며 요한이 기록한 마지막 일곱 번째 이적을 행하셨다.
이 일곱 번째 이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일곱 번째 이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은 기적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이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말의 뜻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무언가를 가르키고/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곱 이적들은 다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고 예수께서 어떤 분 이심을 나타낸다.

첫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적이다.
이 이적은 오직 예수만이 삶의 참 된 기쁨이시요 충만함 이심을 나타낸다.
두 번째 이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이적이다.
이 이적은 예수께서 질병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 이심을 나타내며 죄로 말미암은 우리의 영적 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세 번째 이적은 베데스다 못 근처에서 38년 동안 병자된 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이 병을 통하여 죄는 우리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알려주신다.
네 번째 이적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고 예수께서 우리가 꼭 필요한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낸다.
그 이후 물 위를 걸으신 이적은 자연 마져도 복종시키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자를 보게 하심으로 죄인들이 영적으로 눈 먼 소경임을 알려주시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시력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면 오늘 이 일곱 번째 이적은 어떤 영적 의미가 있을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영을 다시 살려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다.
죄악 가운데 죽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태이다.
나사로가 나흘동안 죽어 있어서 몸이 썩기 시작했고 전혀 소망이 없는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영은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셔서 부르신다.
죽은 자를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일곱 번째 이적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 음성을 들으셨는가?
부활과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을 부르시고 계신다.
그 음성이 들리면 듣고 순종하며 따르겠는가?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께서는 부르셨다.
그 은혜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겠는가?

여기서 한가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겠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하지만 영적 의미로 본다면 나사로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 또한 예수께서 부르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육체적 죽음에서 다시 살게 된 자는 나사로 하나이지만 영적 의미에서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그의 누의 둘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들의 삶 또한 새롭게 변화 되었다.
다음에 더 자세히 나누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방법, 접근하시는 방법이 다르는 것이다.
우선 마르다를 보자.
우리가 2주 전에 읽었던 내용이다.
21절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23, 25-26절 –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에게 새로운 진리의 가르침을 주셨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떠한가?
32절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언니 마르다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 단어 한 단어 다 똑같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답하시는가?
33-35절 –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자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겠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여기 33절에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그리고 다시 38절에 “비통히 여기시며”는 번역이 잘못되어 있다.
이상하게 모든 성경 번역이 (영어도 마찬가지) 이 말씀을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을 뜻한다.
화를 내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닌가?
무엇에 화를 내는 것이냐, 어떻게 화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화 내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예수께서는 무엇에 화를 내셨는가?
죽음, 죄에 화를 내셨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이 더 큰 영광으로 이어질 것을 아셨다.
안 좋은 상황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자 다시 돌아와서,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35절 – 눈물을 흘리셨다.
똑 같은 말을 했는데 마르다는 가르침을, 마리아는 눈물을 받았다.
왜 그럴까?
특히 마리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바로 몇 분후에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셨다.
나 같으면 울지말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몇 분후에 큰 기쁨이 바로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 예수의 은혜와 사랑이 보이시는가?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그가 완벽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완벽하신 사랑을 보여주시는 완벽한 카운슬러 이시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그것이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같이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슬플 때 같이 슬퍼해 주는 사람처럼 위로가 되는 사람도 없다.
물론 때론 가르침이 필요하다.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방울의 눈물을 같이 흘려주는 사람이 필요한 자들도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똑 같은 말에 한 사람에게는 진리의 가르침으로 또 한 사람에게는 눈물을 흘리심으로 그들을 만나주신 것이다.

자 결론을 맺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불러 주시는 예수, 그 분은 우리의 가장 큰 필요인 영적 거듭남을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주셨는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죽음을 당하시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를 살리셨다.
다시 말해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께서 죽음을 택하셨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나오게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무덤으로 가셨다.
여러분 이 은혜를 아시는가?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다른 종교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는 확실히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그 부활의 삶을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당신의 삶을 내려 놓으셨다.
이 사랑과 은혜를 아시는가?

그 은혜를 안다면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은혜를 전해야 한다.
어떻게 전하는가?
39절 – “돌을 옮겨 놓으라”
44절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살리시는 일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돌을 옮기는 것이고 베를 풀으는 일이다.
생명의 말씀이 전해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그 말씀을 받은 자를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다.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전해질 수 있기를, 그 사역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