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삶 – 요한복음 15: 12 – 17

사랑의 삶
요한복음 15:12-17

지난 주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라 하시고 우리를 가지라고 하신 말씀을 나눴다.
포도나무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다른 목적으로 쓰여 질 수 없는 것이 포도나무다.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건축에 사용할 수도 없고 땔감으로도 소용이 없다.
포도나무의 유일한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도 결국에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만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확장하는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궁국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열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비로서 맺을 수 있다.
5절 말씀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의미를 찾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의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님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가지 유혹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뿌리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예수 안에 거하시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11절 말씀처럼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역사를 채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랑의 삶이다.
12절, 17절 말씀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은 사랑하는 삶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사랑의 삶에 대하여 세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첫째는 이 사랑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이고, 둘째는 사랑의 삶이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결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원동력을 살펴보자.

첫째,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삶의 모습이다.
요한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사도이다.
자기 자신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도라고 칭하기도 했다.
사랑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헬라어로 사랑은 몇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 중 성경에 주로 나오는 아가페와 필레오를 살펴보면 마태복음에는 아가페가 9번, 필레오가 5번; 마가복음에는 아가페 6번, 필레오 1번; 누가복음에는 아가페 14번, 필레오 2번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아가페가 44번, 필레오가 13번이나 나온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늦게 저술 되었고 1세기 말경 기독교의 성숙한 신학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만큼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모든 성경의 계명들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듯, 사랑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사랑의 모습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고 헌신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을 느낌이나 감정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누군가를 봤을 때에 내 가슴이 뛰거나 머리가 몽롱해지거나 내 마음 속에 무언가가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예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호감있어 하는 것, 사람도 포함,에 끌리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예쁜 것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안 예쁜 것들은 아애 못간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헌신하며 희생하며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13절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까지 남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위대하다.
오늘은 아버지의 날이다.
어머니의 날은 큰 잔치인데 아버지의 날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 특히 한인사회에서는…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떠한가?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가정에 중요한지 모른다.
(영재들을 보면 아버지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아버지들이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는데, 요즘에는 가정에서도 인정을 못 받는다.
모든 아버지들 화이팅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고가 났을 때에 부모는 자녀들을 먼저 생각한다.
이런 모습이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의득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들을 품어주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손해본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헌신 할 수 있는 그런 삶이 필요하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두번째로 사랑을 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의 친구가 된다.
14-15절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님의 말씀을 행하면 주님의 친구가 된다.
하나님의 친구라 직접적으로 불러진 자는 성경에 아브라함 밖에는 없다.
이러한 특권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면 축복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친구란 무슨 뜻인가?
궁궐의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왕의 측근을 뜻하고 있다.
왕의 뜻을 알고 왕을 위하여 행동하는 측근들이다.
왕이 원하는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자들이다.
다윗이 도망하다가 목이 말랐을 때에 다윗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물을 가지고 온 자들 같은 사람들이다.
즉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서로를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삶을 의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 나를 희생하면서 남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16절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세워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다.
무엇을 위하여 택하셨는가? – 열매를 맺게 하려고…사랑의 삶을 살게 하려고.

그런데 우리를 택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하신 것이 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려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는데 끝까지 보여주셨다.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그 분이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람은 때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는 있다.
가족을 위하여, 혹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는 있다.
그런데 원수를 위하여는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놀라운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그 원수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이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고 있었던 우리는 하나님과는 원수였다.

혹 나는 별로 죄를 짖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왜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늘어나는지 아는가?
코가 늘어날 수 있는 길이에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입이나 눈이 커진다고 했다면 한계가 있다.
얼굴 크기 이상은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가 늘어나는 것은 한계가 없다.
무슨 말인가?
거짓말의 양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기 위하여 언어가 발달 되었다는 말도 있다.
한부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악하다는 뜻이다.

이런 악한 우리,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롬5:6-8, 10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끝까지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혹 이곳에 아직 이런 주님의 사랑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소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의 마음속에 깨달게 하여 주옵소서 간구하기를 바란다.
주님의 성령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여러분 마음 가운데 싹트게 하시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사랑을 아는 여러분들, 이 사랑을 알면 그 사랑을 나누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사랑을 나누고 열매가 많이 맺어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낫게 여기고 희생하는 삶.
그런 사랑이 넘쳐나는 우리 참빛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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