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2): 오직 은혜
로마서 3:19-31
지난 주에 이어 비전 시리즈가 계속된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경험을 하고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나누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화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케 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과연 어떠한 삶일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영혼구원과 제자훈련이 목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둘 다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영혼구원과 제자훈련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지 마지막 최종 목표는 아니다. 최종 목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하나님 영광이다. 그리고 영혼구원과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방법, 수단 중 한 부분인 것이다.
이 목표가 뚜렷한게 중요하다.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적이 있는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깃털 하나가 날라 다니는 장면이 오래 나온다. 이 깃털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람에 날리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를 대변하는 물체다. IQ 가 75정도인 포레스트 검프는 인생의 목적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 이 주인공의 삶은 전부 다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많는데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냥 우연히 마주친 것들만 경험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목적과 목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냥 우연히 경험하다가 죽으면 별 의미가 없다. 우리의 목적.목표를 알고 생활해야 한다.
모든 물건이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에 의해 정해진다. 그렇게 써야만 값어치가 인정이 된다. 아무리 비싼 드라이버 (골프)도 침대 밑에 들어간 물건을 꺼내기 위해서만 쓴다면 아무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이 만든 용도로 사용될 때에 빛을 바란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목표, 목적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통해 정해진다. 그 목적이 뭐냐면 하나님 영광이다. 이사야 43:7 –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소요리문답 1문 –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목적이다. 물론 다른 목적들을 세울 수 있다. 교회 부흥, 전도, 선교, 혹은 개인적인 삶 속에서 어느 학교 입학, 좋은 직장, 가정 등, 여러가지가 작은 목적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궁국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달란트와 나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사용하며 선을 이루는 것이다. John Piper 목사는 소요리문답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에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즐기고 그 목적대로 사용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하나님의 창의성과 놀라움과, 완벽함을 창조물의 역할을 다하면서 나타내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의 야구선수 중 하나인 베이브 룻스는 홈런왕으로 유명하다. 100년이 훨씬 넘는 미국 야구 역사 중에 홈런을 3번째로 많이 친 선수이다. 그런데 그는 원래 투수였다. 투수로써도 잘 했지만 타자로 전환하면서 그의 진가가 들어났다. 자신이 가진 달란트를 가장 최적으로 사용하면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살아간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갑게도 성경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런 삶, 즉 하나님께 영광이 드려지는 삶을 우리는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바울은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죄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죄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도 죄고, 내가 마땅해 했어야 하지만 하지 않은 것도 죄다. 내가 하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하게 하지 못한 것도 죄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또 아마 우리가 스스로 상상하는 것 보다도 훨씬 큰 죄인들이다.
이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바른 일을 많이 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혹은 천국, 낙원에, 혹은 영적 만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들을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그렇다.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봉사도 하고,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려고 하고, 남과 더불어 화평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이다. 물론 율법이라는 것을 들어본 자들은 유대인들 뿐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율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 살아가면서 하늘 나라에, 낙원에, 열반에 이르고 드러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가?
절대로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아니 나는 봉사도 많이 했는데, 아니 나는 더 많은 기부를 했고, 선을 행했고, 잘못한 적도 없고, 십계명도 잘 지키고, 주일 성수도 잘 하고, 십일조도 잘 바치고…
2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그 청년은 모든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만했고, 자기 스스로 정상에 거의 다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족한 것 하나가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예수께 물으러 왔는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결국 네가 지금 가고 있었던 그 율법의 길은 잘못된 길이었고 그 길로는 정상에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한가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이 하는 역할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아직도 나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을 못 믿겠는가? 로마서 2:12 – “무릇 율법 없이 법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우리가 율법을 알건 모르건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적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들은 것을 가지고 우리가 심판을 받는데,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을 – 겉과 속을 – 우리가 태어 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녹화하고 있는데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그 태입을 다 공개해도 괜찮다라고 생각을 할까? 나의 생각까지도 담겨 있는 이 태입, 내가 혼자 있을 때에 하는 행동들이 다 녹화된 것을 다 공개해도 괜찮을까? 우리 가운데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해주고 율법 또한 우리의 죄를 들어내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은혜로 말미암아이다. 은혜… 은혜가 무엇인가?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무 대가 없이 거져 주어지는 것이다.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고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없었던 그 의가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많이 들어봤던 말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교회의 메시지는 없다. 그리고 바로 이 메시지가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른 점이다. 모든 종교는 내가 열심히 해서 정상에 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해야 되는가 이다. 항상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나를 의지하고 나간다면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는지 불안하고 힘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의 메시지는 나의 열심히 아니라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예수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셨고 그것을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공짜로 받았다.
내 열심히 아니니까 내가 나를 내 세울 이유가 없다. 27-28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자유롭다. 내가 이미 의를 얻었으니 그것에 감사하며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내 열심히 충분한가에 대한 걱정이 없다.
저는 이 복음의 메시지가 우리 교회의, 그리고 모든 교회의 메시지여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지역 사회에 어둠을 몰아내는 참 빛이 되고, 갈증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굶주린 자에게 떡이 되고, 힘든 나날을 보내는 자들에게 위로의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려면 오직 이 복음의 소식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을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자.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