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생명의 주님
요한복음 11:17-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는 과연 부활하셨다.
부활절에 관한 설명을 따로 드리지 않겠다.
아까 비디오에 나온 두 친구들이 너무 설명을 잘 했기 때문이다.
그 두 친구는 입양된 친구다.
한명은 2011년 이디오피아에서 또 한명은 같은 해에 중국에서 입양됬다.
양부모님은 믿음이 너무 좋은 분들이고 이 두 친구외에 한명을 더 입양해서 지금은 다섯명의 가족이 축복의 삶을 나누고 있다.
이 친구들의 만든 비디오들이 여럿 있는데 특히 아버지 날을 위하여 만든 비디오는 너무 감동적이다.
자신들은 아버지가 없었지만 (father-less) 아버지가 가득찬 (father-full) 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버지가 없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입양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는 이 아이들이 그 어느 유명한 목사들이나 성경학자들 보다도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부활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절의 핵심은 무덤은 비었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리고 이 복잡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이 부활의 사건은 과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이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다.
IS 는 계속해서 태러를 저지르고 기독교인들을 사살한다.
기근으로 인하여, 또한 깨끗한 물이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너무 많다.
많은 어린 여자 아이들은 성매매로 그 부모들이 팔아 넘기기도 한다.
우리의 모국인 한국은 지금 정치권의 싸움과 더 크게 북한의 위협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에 살고 있다.
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개개인의 삶은 어떠한가?
전부가 다 괜찮은가?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건강의 문제, 가정/자녀들의 문제, 경제적 문제 등등
그 누가 자신의 삶에 다 만족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살겠는가?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이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처럼 절망적인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이룬 것이 많다 하더라도 죽으면 끝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약 50년 전쯤, Sulpicius Severus 라는 로마인은 유명한 연설가인 Cicero에 위문의 편지를 보낸다.
Cicero 의 딸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주 따듯하고 감동적인 편지였다.
하지만 생후의 삶에 관한 그 어떠한 소망의 내용도 없었다.
Cicero 의 답장은 편지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현하고 자신의 아픔에 대하여 더 설명을 했다.
한세기가 지난 후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 때문에 슬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이 내용은 너무도 달랐다.
물론 죽음을 애도하고 함께 슬퍼하는 내용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부활의 소망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살전4:13-14,18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게 데리고 오시리라…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고 또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처럼 우리도 함께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혼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부활의 소망이 어떻게 다가 오는지 살펴보자.
첫째, 부활의 소망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드리고 우리의 생각대로 그분을 작게 만들면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실꺼야.
문제는 그것 외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마르다를 보면 예수의 능력을 제한시켜서 믿는 모습을 본다.
21절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예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주께서 계셨더라면 – 지금 말고 나흘전에 여기 오셨더라면…
그리고 여기에 계셨더라면…
물론 바로 다음절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지 에는 부활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안다.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할때에 이미 시체가 부페되었을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모든지 하실 수는 있지만 지금, 여기는 아니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내 상황을 해결하실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2004년 신대원을 다니고 있을 때 교회에서 가을 수련회를 갔다.
수련회 기간이 American League 결승전, World Series 출전권을 가지고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다투고 있었다.
3차전까지 치뤘는데 양키즈가 3-0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 어느팀도 7차전 시리즈에서 3-0으로 지고 있다가 4경기를 연속으로 이긴적이 없었다.
수련회 강사가 마지막 날, 그 어느 야구팀도 그렇게 역전을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 라고 설교시간에 말했다.
모두들 다 하나님께 불가능하신 것은 없지만 이것은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때에 보스톤이 역전승을 하고 World Series 에 올라가서 86년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물론 그 경기 결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서라는 것은 아니다.
단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지 않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 인류에게는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니다라고 믿지 아니하는가?
마르다는 예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 것이다라고 하니까,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지금 역사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을 자신이 받아드리지 못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나의 생각, 나의 제한적인 마인드로 그분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면, 그분께서 여러분의 삶에, 우리 교회의 삶에 역사하시고자 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시기 바란다.
두번째로,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다.
예수는 바로 당신께서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오라비가 다시 살겠다는 말씀을 듣고, 마지막 때에 모든 인류가 부활할 날에 대하여 말한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단순히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이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시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뜻은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이것이 육체적 생명을 뜻하는 것이냐 아니면 영적 생명을 뜻하는 것이냐 많은 의견들이 있다.
저는 둘 다 적용이 된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계신 곳에는 육체적 부활과 생명이 있고, 영적으로 함께 하신 곳에는 영적 부활과 생명이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부활을 채험한 자들이고 우리 안의 영혼은 살아 숨쉬는 것이다.
마지막 날,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는 육체적 부활을 채험할 것이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그 부활을 채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안에 거하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시기 바란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고백한다.
27절 –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 같다.
하지만 너무도 큰 고백이다.
비슷한 고백을 우리는 들어보지 않았는가?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르다는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다 이해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을 했다.
과연 어떻게 부활이 이루어질지, 예수께서 부활이시고 생명이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고백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자 이 고백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그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자신의 필요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채워 주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만 바라보는 믿음, 고백이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바로 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오시는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 되어 있는 대로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이다.
이런 고백이 있었을 때에 마르다는 오라비의 부활을 채험할 수 있었다.
이런 고백을 함으로 주님의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다.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그 분과 함께 있을 때만 생명과 소망이 있다.
그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고백하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