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 요한복음 3:1-16

미국 남쪽은 Bible Belt 라고 한다.
거기선 기독교인으로 태어나고 또 나중에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다고 한다.
거듭난 기독교인 – 이 말은 참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6,70%가 거듭난 기독교인을 이웃으로 두는 것을 꺼려한다고 한다.

거듭남에 대하여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과연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영적으로 무슨 변화를 보여야 하는가?
(특히 한국인 신앙은 이 영적 문제에 많이 예민하다. 방언, 환상, 신유, 등. 한국 토속 신앙인 샤만니즘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진정한 거듭남은 무엇인가?
새롭게 사는 것을 뜻한다.
죄악에 빠져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사울처럼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살다가 예수를 만나고 삶이 180도 바뀌여 바울이 된 그것이다.
어거스틴 – “어거스틴, 나에요”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여기서 질문을 드리면 믿음이 먼저인가, 거듭남이 먼저인가?
거듭남이 먼저이다.
거듭나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아니 믿음이 있어야 믿음대로 살아가고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삶이 변해간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거듭남이 먼저이다.

거듭나지 않는다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살아가는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열매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아니라 우리의 죄의 열매가 된다.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이 변하고 우리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열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안된다.

사과 나무를 심었고 사과를 몇 년 먹은 후 복숭아가 먹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 더 큰 사과가 난다.
그래서 가지도 더 잘 쳐주고, 비료도 더 주고, 그러면 – 더 큰 사과가 난다.
복숭아를 먹고 싶으면 사과 나무를 뽑고 복숭아 나무를 심어야 한다.

죄악 속에 있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하여도, 우리는 죄의 열매 밖에 맺지 못한다.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거듭나야 한다.
아무리 열심이여도 우리의 열심은 부족하다는 것이 바로 예수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라 하는 자가 예수를 찾아간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한다.
그가 예수를 찾은 이유는 아마도 예수와 함께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던 것 같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사히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왔는데 혼자만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의 지도층 가운데 예수를 싫어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를 받아드리고 그와 함께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답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엉뚱한 답을 하신다.
그런데 엉뚱한 답이 아니다.
니고데모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다.
자신이 부족한 그 부분을 이제 예수를 통해서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지금까지 그가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누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가?
마약을 하는자, 살인자, 사기를 치는자, 온갓 여러 죄인들.
물론 그들은 거듭나야 한다.
거듭남이 필요없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니고데모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모두 거듭나야한다.
만약에 나는 괜찮아라고 생각한다면 안된다.
우리 모두 – 누가 우리인가?
우리 다 – 1세, 2세, 모든 문화, 모든 사람 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해 왔던 모든 행위들, 우리의 모든 열심과 노력, 그것이 교회 안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었다고 해도 우리의 열심이었고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다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거듭났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열심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우리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거짓말을 했을 때
•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예수를 단순히 좋은 스승으로 여긴다면…
o 선생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 했구나 –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o 두려움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한다.
• 하지만 거듭나서 예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으면
o 나의 거짓말 밑에 다른 죄가 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수의 사랑보다 내게는 더 중요했구나.
o 그래서 죄 뿐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죄를 회개한다.
열심이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니고데모 – 말 수가 적어졌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 –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산은 어머니의 고통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거듭남도 마찬가지 –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요한복음 3:14-16
니고데모는 결국 거듭남을 받았다 – 예수의 시신을 묻음
거듭남을 받고 거듭남을 받은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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