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누가복음 15:1-3,11-32
다 같이 옆 사람과 인사해보자. “천사 같아 보인다. 선하고 은혜로 와 보인다.”
한번 더 옆 사람에게 말합니다. “찔리시죠?”
왜 찔릴까?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온다고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까 아침부터 샤워하고, 화장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지 하면서 양복을 꺼내고 정장을 꺼내고, 그래도 내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옷을 입고 단정하게 하며 교회에 나오지 않았는가?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나오지 않았는가? 웃는 연습도 해 보고…
그런데 왜 은혜롭게 보인다, 선하게 보인다, 천사 같아 보인다 라는 말에 찔릴까?
그것은 우리가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의 삶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전에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여러분께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나 내 생각, 그리고 내 삶을 다 아신다면 여러분은 저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나 여러분의 생각,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다 안다면 저도 여러분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고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죄악이 가득 찬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은혜로 대해 주셨다. 복음의 메시지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받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 차 있어야 하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새 삶에 감사하니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 삶 속에 임한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아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자.
이런 사랑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Tim Keller 목사는 낭비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부른다. (책의 제목인데 너무나 은혜로운 내용이어서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낭비하신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오늘 저희가 읽은 이 비유의 말씀은 탕자의 이야기다. 사실 다들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일 것이다. 탕자를 영어로 표현하면 Prodigal Son 이 된다. Prodigal 이란 흥청망청 쓰고 낭비하는 것을 뜻한다. 여러분, 아마 What Happens in Vegas Stays in Vegas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Las Vegas 에서 일어난 일은 거기에다 묻는다라는 뜻인데 거기서 노름을 하고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하고,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거기서 일어난 일이 나의 일상 생활에 밝혀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Tim Keller 목사님은 이 prodigal 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했다. 흥청망청 쓰시는 하나님. 낭비하시는 하나님. 왜일까? 하나님은 사랑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에게나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전혀 사랑을 받으면 안되는 자, 은혜를 받으면 안되는 자에게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다.
여러분, 무엇이 낭비인가? 값어치가 없는 것에 큰 값을 지불하는 것이 낭비이다.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낭비이다. 크게 신경을 안써도 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낭비이다. 똑같이 $100을 썼다고 해서 낭비가 아니다. $100어치 값어치를 하는 것에 $100을 지불 했으면 낭비가 아니다. 그런데 $100어치가 전혀 아닌 곳에 그 값을 지불하면 낭비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똑같이 2시간짜리 영화를 봤는데 어느 영화는 재미있었고 감동을 받았는가 하면 시간이 아까운 영화가 있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나에게 항상 무엇을 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를 속 터지게 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에게 잘 해주는 것은 괜찮지만 후자에게 잘 해주는 것은 너무 아깝고 낭비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신다. 사랑 받으면 안되는 자를 사랑하신다. 자신의 욕심만 내 새우는 그런 배은망덕한 자에게 마저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정말로 낭비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헤프게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닌가? 전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해 주셨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 주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인가?
우리는 보통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이야기다. 둘째 아들은 어떤 아들이었는가? 둘째 아들은 정말로 못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눠달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바램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을 낭비했다. 재산이 다 없어지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엎친데 겹친 격이라고 힘든 일은 계속 이어서 오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돼지를 치게 되며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맘을 먹는다.
이 둘째 아들이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서 맞이하신다. 이 모습이 바로 낭비의 모습이다. 둘째 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오려고 했을 때에 이미 품꾼이 되리라 결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과분한 사랑을 보여 주신다.
20절 –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마추니…
22절 –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다시 아들로 받아 주신 것이다. 옷 – 다시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옷의 중요성 – 요셉과 체색 옷, 삼손과 옷 내기, 예수의 흰 예복)
23절 –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보통 큰 잔치가 아니다.
아무리 봐도 이런 사랑은 둘째 아들에겐 과분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랑을 배풀어 주신다. 왜? 아버지니까. 더 이상의 이유가 있을 수 있나?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아들에게 가 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는 사랑한다. 낭비라 생각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 감동이 되지 않는가? 죄악에 빠져 있던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그런데 그 시대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스러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비유를 말하는 예수를 받아 드릴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이 이야기를 정확히 본다면 이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먼저 세리와 죄인들이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배척 당하고 정죄 당하고 비판 당하던 자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볼 때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이 비유에서는 둘째 아들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한 무리가 더 있다.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불평하고 정죄하는 자들이다. 이 사람들이 과연 이 비유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비유로 하여금 마음에 감동이 있었을까? 절대 아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확실히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첫째 아들의 모습이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고 열심히 일한 자가 아닌가? 둘째 아들이 제물을 받고 떠난 것을 보면서도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자신의 맡은 도리를 잘 행한 사람이다.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다.
그런데 이 첫째 아들이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자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동생이 살아 돌아와 감동하고 기뻐했는가? 동생을 안아주고 입을 맞추고 하였는가? 아니, 오히려 노하며 아버지께서 동생을 위해 베푼 잔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첫째 아들도 원했던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지만 첫째 아들은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결국 순종의 이유가 아버지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유산을 탐해서 그런 것이다.
첫째 아들의 마음이 이랬는지 어떻게 우리가 아는가? 29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영어 성경에는 “slaving”이라고 나와있다. 결국 종처럼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아버지께서 알아 주기는커녕 자기가 물려 받아야 할 제산을 가지고 동생의 잔치를 베푸시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나는 노력하고 나는 순종했는데 나보다 못한 자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아닌가? 왜 이런 죄인들이 랍비라는, 선생이라는 예수와 함께 하는가?
그리고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바리새인들을 우리는 참 안 좋게 본다. 사탄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며 자신들의 의를 세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며 우리 스스로의 의를 세우는가? 내가 장론데, 내가 집산데…내가 이 교회 창립멤번데…
여러분, 만일 우리교회에 어느 사람이 허름한 옷 차림으로 술 냄새, 담배 냄새 풍기고 들어 온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우리가 불편한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온다면? 휴스톤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는 흑인이 교회에 들어오자 아이들 보호하고 귀중품 숨기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 저기 피어싱 한 이상한 분위기의 사람이 온다면? 혹은 동성애자나 마약하는 자나 이런 사람들이 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죄는 용납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들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떨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바란다. 혹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지는 않은지.
여기 놀라운 은혜의 말씀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둘 다에게 베풀어 주신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며 그를 받아주신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화를 내며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자 그를 설득시키시고 계신다. 설득 시키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첫째 아들도 사랑하셔서 그가 함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첫째 아들이건 둘째 아들이건 간에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 둘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삶을 우리는 살아야겠다. 어떻게 이런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앞으로 몇주간 함께 살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