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알고 예수가 아시는 삶 – 요한복음 10:22-42

예수를 알고 예수가 아시는 삶
요한복음 10:22-42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울 때가 많다.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
정치인들은 선거공약으로 나라를 바꾼다고 하지만 당선이 되고 나서는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다른 당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어린 아이들도 잘못을 하고 나면 주변에 다른 친구나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왜 남에게 책임을 돌릴까?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모든 나무의 과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계명이 싫었다.
하와는 이 계명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그는 단순히 뱀에게 속았다.
너희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되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말에 넘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씀을 더 믿었던 것이다.
디모데전서 2:14 –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아담은 속은 것이 아니다.
아담은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찾아 오셨다.
여자는 뱀이 나를 속여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만 아담은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창세기 3:12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기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결국 여자의 잘못이고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산다.
죄 때문에 책임을 지기 보다는 남을 탓하는 삶을 산다.
특히 하나님을 탓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지 않는 이유가 예수께서 잘못하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v. 24 –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우리에게 믿게 하려면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라는 것이다.
알아 듣기 힘든 비유나 이런 것이 아니라 메시아면 메시아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v. 2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고 또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신다.
문제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감추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거는 많고 눈 앞에 선명하게 보여졌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끌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들어서 믿는다고 했다.
왕의 신하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가니까 아들이 고침을 받았다.
베드로는 예수께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 자신들이 어디로 가겠느냐고 고백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으로 시작하여 11장에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 까지 7개의 이적을 행하셨다.
물론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외에 더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다.
이 모든 이적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결국 이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은 믿기가 싫은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믿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의 메시아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떤 메시아인가?
정치적인 메시아다.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주고 자신들의 삶을 풍족시키는 그런 메시아를 원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런 일들보다는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장님의 눈을 여시고, 아픈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이런 일들만 하시니까 그를 믿기 싫었고 그 책임을 다시 예수께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두운 곳에 있고 그들 스스로 마음을 완팍하게 해서이다.
증거가 있어도 그 증거를 받아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차를 몰다가 경찰이 따라온다.
옆에 차를 세우니까 경찰이 지금 왜 잡혔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왜 잡았냐고 하니까 제한속도가 얼마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55 마일인지 65마일인지…글쎄 나는 65마일 정도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65마일, 때론 70마일로 갔는데 아까 제한속도가 55마일이라는 싸인을 보지 못했는가?
아, 그 싸인이요? 아까 200m 전에 봤는데, 운전자로 하여금 제한 속도가 55마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면 싸인이 더 자주 있어야지요?
그러면 경찰이 어떻게 반응할까?
당신 말이 맞다라고 하면서 싸인을 더 세우겠다라고 할까?
문제는 증거가 보족해서가 아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이 수전절 때,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고 요한은 전하고 있다.
수전절은 어떤 절기인가?
셀류쿠스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167 BC 에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제우스를 섬기라고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가져다 놓았다.
유대인들은 반발했고 유다 마카비우스의 지도 아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며 164 BC에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정리하고 다시 헌당한 때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촛불을 밝히며 즐거움이 넘치는 이 절기는 오늘날 Hanukkah 로 지켜지고 있다.
이 즐겁고 어두움에 빛을 밝히는 절기에 그들은 겨울처럼 자신들의 마음을 꽁꽁 얼게 하여 이 세상에 참 성전으로 오시고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받아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니, 말씀이 없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그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지만 그들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수를 돌러 치려까지 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믿는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영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을 믿는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다.
이 영생은 누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잃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잃을 수 있다면 영생이 아니다 –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
예수를 믿으면 주님 손에 붙잡히게 되고 절대로 실족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시니 우리를 놓치실 수가 없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면 주의 손 안에서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시기 바란다.
믿고 의지해야 하는 이유의 증거는 충분하다.
그 증거를 왜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믿는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아마 여기 대부분의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은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후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왜 중요한지 말씀드리겠다.

예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예수께서 아시는 삶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나를 아셔야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들은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지난 두주 동안 봐 왔던 것처럼 양들은 자기의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결국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양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아시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하겠다.
우리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알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예수의 양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예정론이고 장로교에서만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오히려 누가 믿고 안 믿고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한다.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장로교의 진리만이 아니요 성경의 진리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깊숙히 이 교리에 대하여 나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양 무리에 속하도록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죽어 마땅한 우리를 예수의 양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 믿는 자들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계시하신 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책임은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만한 것들이 상세히 이 세상을 통해서 증거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믿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결론으로, 내가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배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가 주는 큰 영향이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께 잘 보여져서 하나님이 나를 받아드려 주신다면 그것은 절망적인 삶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단순히 감사하며 그를 위하여 살면 된다.

아까 말씀 드렸지만 이미 믿는 나에게는 무슨 교훈이 있는가?
v. 27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믿는가?
그렇다면 그를 따라야 한다.
정말로 그의 음성을 듣는가?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기를 소망한다.
내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그가 아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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