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젼 1: 오직 말씀

비전 (1): 오직 말씀

디모데후서 3:16-17 (열왕기상 19:9-18)

오늘부터 비전 캠페인을 시작한다. 사실 비전 캠페인이라기 보다는 참빛교회를 소계하는 설교 시리즈다. 참빛교회는 무엇을 믿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 가려고 하고 있는지를 나누고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

이 비전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것이 있다. 소그룹에 참여하시길 바란다. 예배를 마치고 친교 후 소그룹이 진행이 된다. 이 소그룹에서는 설교 내용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설교로 들어도 좋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것들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만큼 은혜도 더 크리라 믿는다. 이 캠페인을 통하여 참빛교회가 주 안에서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며 더 부흥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참빛교회의 비전은 “모든 세대가 헌신하며 세워가는 신앙 공동체”이다. 이 비전2020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인도 아래 새운 우리 교회의 비전이다. 교회 안에 어린 아이로부터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까지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 교회의 가족이다. 교회 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선 모든 세대가 함께 헌신하며 함께 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민 교회로서 이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통계에 의하면 한인 청년들의 90% 이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한인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그 중에는 교회를 아주 떠나는 청년들도 있고 미국 교회나 다민족 교회로 가는 청년들도 있다. 그 이유는 청년들이 자란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라는 인식보다는 그냥 부모 세대의 교회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2세들에게 한인 교회란 부모의 교회이고 나는 발언권이 없고 결정권이 없는 그런 교회이다. 새로 가정을 꾸리고 성인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이들은 한인교회를 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는 한인교회가 할 일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뿌리를 가르쳐주고 정체성을 키워주며 또 신앙으로는 한국인의 영성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한인교회는 어른들의 교회, 학생들이나 2세는 저 코너에 있는 소예배실 같은 곳에서만 예배 드리며 어른 예배를 방해하지 않는 그런식의 교회가 되서는 안된다. 1세이건 2세, 혹은 3세이건, 한어권이건 영어권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더욱 나아가 한인이건 타민족이건 다 같은 교인으로서 함께 헌신하고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비전에 대하여는 더 자세히 나중에 나누기로 한다.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참빛교회의 비전2020, 이 비전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욱 더 나아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이 어떤 삶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다 말씀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는 것,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려주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과 하나님을 알게 해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바로 성경이다. 500년 전 마틴 루터가 종교계혁을 시작하면서 강조한 그 것.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말씀이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으로 인도해준다.

오늘 본문을 보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이 바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NIV 는 성경은 우리를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준비를 시켜준다고 한다. 어떻게 준비시켜 주는가? 어떻게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통해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해 주고, 그 잘못된 부분을 바르게 고쳐주며, 어떤 것이 의로운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여기서 한가지 더. 모든 성경이라고 한다. 중요하다. “모든” 성경. 어느 특정 성경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다. 구약, 신약 모두 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 된 것이고 히브리서와 그 외에 여러 구절에서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 지는데에는 말씀 만이 다는 아니다.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는 신앙이 자라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방법이 4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웨슬리의 사각형, 혹은 감리교의 사각형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전통이다. 셋째는 채험 혹은 경험이고, 마지막 네번째는 논리이다. 물론 웨슬리는 전통, 채험, 그리고 논리는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전통, 채험, 논리 모두가 다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것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 사는 흑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경은 출애굽기이다. 그 이유는 노예해방의 메시지가 출애굽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보지 않는 성경은 바울서신이다. 왜냐하면 종들에게 순종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흑인이라 하여도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이 성경 내용들은 같은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채험하고 경험한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내용을 어느 특정 시각으로 보게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쉽게 받아 드리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힘들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단수/복수를 상대적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 마누라” 같이 단수를 복수로 사용할 때가 많다.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음료수 서너병 사오라고 하면 서너병 사온다.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못 사온다. 세병인지, 네병인지 몰라서.

이렇게 나의 채험이나 전통 등으로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또 그렇게 밖에 볼 수없다. 문제는 내가 채험한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채험한 것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 처럼 믿으니까 문제다. 반대로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내가 채험한 것 외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너무도 크신 분이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하고 채험한 그 범위 내에 갇아두고 있다. 그래서 내가 채험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남이 다르게 채험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 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경험과 생각과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의견과 주장만 내세우면 안되고 성경을 통해서 보다 더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겠다. 얼마전에 들었던 설교 내용 중에 나왔던 것이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긴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이제 여호와 앞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는커녕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듣고 도망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40일을 걸려 가게된다. 호렙 산에서 굴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자신이 놓인 처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섬겼고 놀라운 이적도 행하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선포하였는데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이제 자신도 죽을 목숨으라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신다. 열왕기상 19:11-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강한 바람, 지진, 불이 있었는데 그곳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데… 13절을 보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였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물어보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세미한 소리이셨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불이였다. 성령은 마가의 다락방에 어떻게 오셨는가? 강한 바람으로 오셨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머물렀을 때에 하나님은 지진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전부 다 이시다. 불, 바람, 지진, 그리고 세미한 소리.

호렙산은 어디인가? 여호와의 산이라고 했는데 바로 시내산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건을 기억하는가? 반석 틈에 서서 여호와의 영광이 놀라운 광경으로 모세 앞을 지나갔다. 시내산은 불과 지진과 바람과 구름으로 둘러 쌓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시내산에 가까지 가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엘리야가 그 산에서 여호와를 대면한다. 굴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실 원어를 보게 되면 바위 사이다. 바로 그 반석 틈이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아마도 모세가 있었던 그 반석 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큰 놀라운 모습으로 지나가시고 엘리야에게는 아주 세미한 소리로 지나가셨다. 왜? 그 사람이 다르고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르게 대하신 것을 알지 않는가? “당신께서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똑같이 얘기했는데 마르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마리아는 예수의 눈물을 보았다.

어느 것이 진짜 하나님이신가? 둘다 진짜 하나님이다. 그런데 내가 세미한 소리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다고 해서 불의 하나님을 채험한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기적적인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병원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믿음이 약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경건하고 전통적인 예배를 선호한다고해서 방언하고 손벽치고 춤추며 찬양하는 자들이 성숙하지 못한다고 할 수 없고 그 반대로 내가 열정적으로 손벽치고 찬양한다고 해서 조용히 묵상하는 자들에게 뜨겁지 못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채험과 내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갇아 두면 안된다. 나의 채험, 경험, 생활, 생각 모두를 말씀으로 근거하여 보며 말씀을 기준으로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40일을 주야로 보내며 호렙산으로 갔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아주 깊이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속에 빠져 산 적이 언제인가? 내 생각과, 내 주장과,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야 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참빛교회가 바로 나아가고 온전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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